
css와의 한판 전쟁
September 14th, 2003
css는 참 많고 독특한 기능과 비주얼을 제공하는 대신에 그 복잡함과 오묘함이 상상을 초월한다. 트랙백을 받은 경우 프레임이 표현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쩔수 없이 원프레임으로 블로그를 개편하면서 이놈의 css와 한판 전쟁을 벌였다.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블럭이 나뉘기도 하고, 100픽셀 정도의 들여쓰기가 나타나고… 미칠 노릇이다. 내일쯤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점검해 봐야겠다.
그나저나 북악에도 블로그를 도입하고 싶긴 한데 역시 무관심속에 사장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선다. 필요로 하지도 않는 컨텐츠를 의미없이 계속 제공하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야심차게 준비한 위키는 이제 나 외에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문구를 떠올리면 결국 그것은 어느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교지라는 콘텐츠를 관리하기에는 위키만한 것이 없다는 개인적인 고집이 결국 무의미한 웹상의 쓰레기를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 불쑥 머리를 내민다…
밤나무골에 다녀왔다. 이제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나무마나 그 꼴이 앙상하고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바람에 한 주먹정도의 밤만을 주워왔을 뿐이다. 할머니 제사에 부족하지 않다하니 그정도로 만족해야지. 올때는 현철이놈 때문에 길을 잘못들어 절벽으로 내려올 뻔 했다. 어릴때 그토록 많이 다녔던 길이 어느덧 희미해져 버린 그런 나이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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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이오덕 선생님을 추억함
September 13th, 2003
KBS 인물현대사인가 하는 프로에 이오덕 선생의 이야기가 나왔다. 근래에 들어 참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코너인데 오늘도 역시 그러했다. 참 가슴 뭉클한 이야기였다.
다음은 한겨레 신문의 기자가 작성한 글이다.
제가 기자가 돼 10여년을 살아보니 아는 사람도 적지는 않아 지인의 부음도 자주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문화평론하던 이성욱 선생의 부음을 듣고 황당한 적이 있었는데요. 최근에 잇따라 세상을 뜨신 이오덕 선생님, 김승훈 신부님에 대해 제가 기억하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그저 두 분 선생님을 한번쯤 직접 만난 적이 있는 한 후생의 기록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선생은 꼿꼿하고 꼬장꼬장할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를 갖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먼저 이오덕 선생님은 국어에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진 분이라면 그 영향을 받지 않은 분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도 대학 시절이나 신문사를 다니면서 이 선생님이 쓴 <우리글 바로쓰기> 시리즈를 가까이하고 제 말하기나 글쓰기에 많이 참고했습니다. 제가 언어관을 확립하는 데 강한 영향을 준 선생님 가운데 한 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것은 받아 내 것으로 삼았고, 어떤 것은 그러지 않기도 했지요.
언제부터인가 우리말을 사랑하는 분들이 많아졌지만, 선생의 우리말 사랑 또한 유별난 것이었습니다. 선생의 우리말에 대한 업적은 따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구요. 개인적으로는 선생의 언어관 가운데 “생활에서 나오는 살아있는 말을 쓰자”는 것이 남다른 탁견이라고 생각하는데요(감히!). 그런 태도는 제가 글을 쓰는 데 한 등불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가 기자로서 기사 쓸 때 그렇습니다.
저는 생전의 이 선생님을 인터뷰를 위해 딱 한 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들어와 수습을 마치고 문화부에서 만 1년이 돼가던 시절이었는데요. 당시 문화부 지면에 우리말 기획 기사(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군요)가 연재 중이었습니다. 지금 검찰 나가는 강희철 선배가 기획한 시리즈였는데요. 거기에 들어가는 작은 인터뷰 기사를 위해 이 선생님을 만났던 것이지요.
그 인터뷰는 제가 기자생활하면서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죄송스런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선생이 돌아가셔서 영영 사과할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96년 1월 제가 선생께 우리말 시리즈 기사 관련해서 작은 인터뷰를 했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승낙하시는 데 두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선생 댁이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의 어느 도시로 서울에서 꽤 거리가 됐다는 점입니다.
인터뷰 기사 자체가 비중있게 마련된 것이 아니어서 저는 경기도 선생댁까지 찾아뵙기가 조금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조금 고민을 하다가 선생께 “언제 서울에 나오실 일이 없으시냐”고 여쭸는데, 선생은 흔쾌히 “따로 갈 일은 없고, 바쁘면 내가 서울로 가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짐을 덜었다는 심정으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하던 날 약속대로 선생님이 한겨레신문을 찾아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노인이었으나, 생각했던 것만큼 선량하고 우리말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분이었습니다.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는 젊은 제가 따를 수 없는 것이었고, 그 나이의 이름을 얻은 사람이 갖게 되는 자신감, 또는 그것은 넘은 자만같은 것은 전혀 없는 분이었습니다. 너무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송구한 마음에 선생을 배웅하러 회사 앞까지 나가서 제가 바보처럼 “뭘 타고 가십니까” 하고 여쭸는데요. 선생님은, 제 기억이 맞다면 “버스 타고 가서 갈아타고 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 “나는 차가 없어요”라고 덧붙이신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제게 한없이 죄송스럽고 또 죄송스런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그렇구나. 저 마르고 구부정한 노인이 적어도 한 시간 정도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이 곳 공덕동 산비탈의 신문사까지 힘들게 찾아왔구나. 고희를 넘긴 저 노인이 27살(당시 제 나이) 먹은 이 새파란 기자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셨구나. 그리고 이제 한 시간이 넘는 길을 또 돌아가tu야 하는구나.”
“살펴가시라”는 인사에 손사래를 뒤로 치시며 이 선생은 휘적휘적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셨습니다. 젊은 제게 큰 교훈을 남겨두시고는 그렇게 떠나가셨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당시 신연숙 문화부장이 그러시더군요. “노인을 여기까지 오시게 했느냐. 선생 뵙기가 민망하더라”하고 말입니다. 저는 말 그대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물론 제가 그 일로 인터뷰나 현장 취재 때의 게으름을 완전히 떨어내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제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 일을 할 때도 자신을 낮추거나 버리는 것을 배우지 못했고,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를 갖추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선생을 만나기 전보다는 제 됨됨이가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고 위안해 봅니다. 나아지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선생께 누가 되는 일이 될 테니까요.
세상에는 단 한 번의 만남에서도 남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말로는 되지 않고, 또 행동을 꾸민다 해도 되지 않는 것이기에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자취로써, 인격의 향기로서 자연스레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여준다”는 표현도 적절치 않습니다. 그냥 드러나고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글에서 보니 이 선생님의 장례식도 선생의 뜻에 따라 당신의 삶처럼 조촐하고 뜻있게 치러졌다고 합니다. 저는 그 곳을 찾아가는 예마저 갖추지 못했으니 정말 못되고 불초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나마 마음을 삼가고 옷을 여며 선생님의 영혼에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은 당시 선생과 인터뷰한 뒤 96년 1월21일치 신문에 쓴 기사입니다.
“우리말을 망치는 것은 배운 사람들입니다. 유치원 교사부터 대학 교수까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이들이 어려운 말을 골라 씁니다. 어떤 유치원에서는 소꿉놀이를 역할놀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이러니 아이들까지 괜히 어려운 말을 따라 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우리말·글 바르게 쓰기 운동을 벌여온 이오덕(71)씨는 쉬운 말을 쓰는 것이 우리말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농민과 노동자처럼 땀흘려 일하는 ‘백성’들의 말이 가장 쉽고 건강하다고 본다. 배운 이들은 괜히 젠체하느라 입으로 하지 않는 말을 머리에서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하므로 주의깊게 말을 써야 하는데도 영어나 일본어, 한자말을 마구 씁니다. 문제는 이들이 생활언어에 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산 말을 버리고 죽은 말을 따라가는 것이죠. 신문은 여러 부문의 온갖 용어들을 한 지면에 적으므로 쉽게 써야 하고, 방송말은 발음을 가르치므로 정확해야 합니다.”
이씨가 보기에, 현대 시멘트 도시의 살벌한 생존 경쟁은 말을 거칠게 만들었다. 환경이 말을 바꾼 것이다. 이를테면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우리말에 된소리·거센소리가 많아진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말은 거꾸로 쓰는 사람의 마음을 거칠게 만든다. 어찌 보면 현대의 우리말이 험해지는 것은 하릴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말은 삶에서 나올 때 살아 있습니다. 배운 사람의 말은 생기가 없고 어렵습니다. 지식인과 언론이 삶에서 나온 말과 글을 써 이들이 뿌리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김규원 기자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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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는….
September 11th, 2003
The Hole, 별로, 안좋다, 이런, 역겨운, …
대개 악당에 대한 심리적인 동일감이 느껴지는데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 영화.
그나저나 오늘은 추석.
현철이. 일 졸라 많이 하다. 정말 많이 하다.
윈저17년 한병, 랜슬롯 17년 1병, 제사용 곡주 한병. 많이 먹었다.
많이 먹어서 이 모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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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AX
September 10th, 2003
박스 오피스 1위란게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겠으나 그래도 어느정도 영화의 재미를 보장해 주기는 한다. 케빈 스페이시가 나오는 영화라 굳이 1위가 아니더라도 봤을 테지만 말이다.
케빈 스페이시는 뭐랄까, 참 유연한 구석이 있다. 유연하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영화에서건 그가 차지하는 자리는 참 편안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좋았다. 마무리에서 약간은 허탈한 기분이 들고, 좀 진부한 교훈을 설파하는 것 같긴 하지만서도 스토리도 좋고 연기도 좋고… 특히 프롯이 행성의 궤도를 그리는 장면에서는 무슨 이유에선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는 정말 외계인인가? 아니면 단순히 정신착란을 일으킨 아픈 기억을 소유한 살인자인가?
너는 누구인가? 너는 무엇을 찾아 여기까지 왔고, 무엇을 찾아 여기를 떠날 것인가?
One Response to “K-P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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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eblog Says:
September 11th, 2003 at 2003-09-11 | am 05:24헉
좋은 영화. 트랙백이 작동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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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Experiment
September 9th, 2003
무섭다. 정말 무섭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무서웠고,
보고 난 지금도 무섭다. 정말 무섭다.
그런데 왜 무서운지는 모르겠다. 팔다리를 자르고
피가 튀는 것도 아니고, 어디선가 불쑥
귀신이 나오지도 않는데 온몸이 오싹오싹한다.
진정한 공포를 원한다면 독일 영화를 봐야 한다.
독일의 호러물에는 또다른 공포가 있다.
한 명을 죽여도 서서히 그러나 아주 잔인하게 죽인다.
독일의 호러물이 두려운 이유는
인간의 근본적인 존엄성과 자유의지에 대해 다루기 때문이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존재의 유약함은 어떤 것 보다도 강력한 공포로 다가온다.
— nKino 네티즌 리뷰중
파리대왕, 배틀로얄, 큐브 등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이 영화는 아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정말 인간이 무서워진다. 보면 알 수 있다.
홍지은 기자의 리뷰를 옮겨둔다.
<엑스페리먼트>는 감옥 시뮬레이션 실험, 즉 인간조건의 실험을 다루고 있다. 대학 연구소 한켠에 거대한 모의 감옥이 설치되고, 간수와 죄수 역을 자원한 20명이 14일간의 체험에 돌입한다. 장난 비슷하게 시작한 감옥 체험은 간수와 죄수간의 힘겨루기라는 갈등 양상을 빚더니 급기야 폭력으로 치닫는다.
인간 본성에는 폭력의 광기가 엄연히 내재해 있는 것일까? 굳이 감옥이나 전쟁 같은 극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약간의 조건만 갖춰진다면 누구라도 그 본성을 드러낼 수 있는 걸까? (또는,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게 있긴 한가?, 인간은 극한 환경을 선한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가?)
영화는 실제로 1971년 스탠퍼드대에서 있었던 실험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2주 예정이었던 실험은 영화에서처럼 5일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의 실험과 <엑스페리먼트>의 큰 차이라면 카메라의 존재일 것이다. <엑스페리먼트>의 모의 감옥에는 사방에 카메라 투성이다. 구석구석을 샅샅이 비추는 CCTV나, 기사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주인공 타렉의 안경을 가장한 카메라까지. 모든 것은 노출되고, 이것은 통제의 기반이다. 간수들이 권력의 맛에 취해갈 때, CCTV로 상황을 지켜보던 연구자들도 그것에 중독된다(결국 그들은 위험 수위에 도달한 실험을 중단시킬 수 있었던 시점을 놓치고 화를 자초한다). 이렇게 놓고 보자면 극한 조건에 처한 인간 실험이 엔터테인먼트로 변화한 미국의 TV쇼 「서바이버」와 다를 게 없다.
1986년에 데뷔한 이래 TV영화 쪽에서 주로 활동해온 올리버 쉬르히비겔 감독은 단단하고 쿨한 연출솜씨로 영화 전체를 장악하고 관리한다. 여러 종류의 카메라의 시점을 섞고, 가끔씩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이탈하여 앞뒤로 점핑하는 솜씨는 녹록치 않은 재능과 경험을 반증한다(폐쇄공간에서 난데없는 폭력과 마주하게 된다는 설정이나 영화의 전반적인 미술은 <큐브>와도 닮아있다). <엑스페리먼트>는 자칫 그게 전부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가끔씩 순간적이나마 묘한 정서를 자아낸다. 짧고 희미하게 발광(發光)하는 그것은 약간의 멜랑콜리한 기운마저 느끼게 한다(이를 테면 타렉이 자동차 충돌사고 후 하룻밤을 보낸 도라를 떠올리는 장면이나 두 사람이 해변에 앉아있는 엔딩).
5일 만에 살육을 부른 감옥 실험은 아무런 해답 없이 끝난다. 인간의 본성에는 어쩔 수 없이 악한 구석이 있는 걸까? 아니면, 의학과 감옥으로 대표되는 합리성과 통제의 시스템이 폭력의 얼굴을 드러낸 걸까?
2 Responses to “Das Experi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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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기 Says:
September 9th, 2003 at 2003-09-09 | pm 05:13고마워!! 간만에 좋은 영화 봤네…
정말이지 가슴이 콩닥콩닥하더라….
즐거운 추석을 보내길…(갑지가 반말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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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ㅇ ㅏ ㅁ ㅏ 도 그 건 ㄴ ㅓ 였 을 걸 » Blog Archive » DAS EXPERIMENT Says:
August 24th, 2010 at 2010-08-24 | am 12:10[…] 이때보다 대단히 시시해졌다. 자유의지에 대한 그 어떤 오마쥬도 없다. 존재하는 건, 울지않는 빨간부져… Posted by Hyungsuk Filed in weblo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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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 Floyd
September 8th, 2003
생뚱맞게 핑크플로이드가 생각이 나서 이리저리 뒤져보니,
예전에 내가 유일하게 테잎으로 가지고 있던 meddle이라는 앨범이 있었다.
정선인가, 기연이에게 복사해서 주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나는데,
이 명테잎은 물에 쓸려가서 찾을 수도 없다.
날도 습한고 바다속에 침전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날,
핑크 플로이드의 meddle 중 Echoes 들을 만 하다.
아, 이 앨범은 정선이한테 복사해 준듯하다. 며칠후 이런 말 들었다.
“졸라, 음악 듣다가 무서워서 죽는줄 알았네…”
1. One of These Days
2. A Pillow of Winds
3. Fearless
4. San Tropez
5. Seamus
6. Echoes
그 때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지, 잘 지내고 있지?
One Response to “Pink Floy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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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기 Says:
September 8th, 2003 at 2003-09-08 | pm 09:03저두 핑크플로이드 광팬이예요….
바다를 유영하는 듯한 느낌의 앨범. 기억이 새롭네요….
블로그 너무 괜찮네요… 계속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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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코와 남삭노이
September 8th, 2003
케이블 티브이를 시청하고 나서 좋아진 것들이 몇가지 있다. 각종 해외 스포츠를 볼수 있다는 점, 하루 종일 바둑을 볼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간혹 볼만한 영화가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케이블이 없었다면 절대 볼 수 없었을 것이 바로 이종격투기이다. 매일이나 매주 있는 이벤트가 아니다 보니 과거의 경기부터 들쑥날쑥하게나마 보여주는데 K1, Pride, KOC의 거의 모든 경기를 보여준 듯 하다. 초기에는 정말 빼놓지 않고 모든 경기를 시청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선호하는 경기와 선수가 아니면 채널을 돌리게 되었다. 사실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이 안난다. 물론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K1이나 KOC는 너무 상업성이 짙은듯 보여 왠지 기피하는 면도 없지 않다. 그나저나 앤디 훅의 화려한 발차기와 전통의 힉슨가, 힉슨킬러 사쿠바라, 육중한 밥샵, 피터아츠, 러시아의 인간병기(이름이 생각안난다. 이런!!!) 들의 경기를 볼 수 있는 것은 분명 케이블의 선물이다.
KOMA(King Of Martial Arts-Grand Prix)를 볼 수 있었던 것도 분명 커다란 행운일 것이다. 무에타이의 전설이라고 불리우는 선수들의 경기를 본다는 것이 쉬운일은 아닌데다가 그 무대가 한국이라니… 쌈코와 남삭노이야 그 명성이 워낙 자자하긴 하지만 실제 눈앞에서 보니 허명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쌈코의 왼발. 전 경기에서 한국선수가 마치 쌈코를 의식하듯 거듭 왼발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스피드는 몰라도 파괴력에서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쌈코의 왼발은 마치 네이팜탄처럼 상대의 가드를 미친듯이 몰아붙였다. 결국 1회 TKO. 정말이지 오호라~~~ 하는 감탄사가 끊이질 않았다. 남삭노이는 쌈코만큼의 파괴력은 부족한 듯 보이나 – 사실 이것은 상대 선수가 맷집이 워낙 강한데 기인한다. – 정교한 펀치와 노련한 게임운영으로 완승을 이끌어 내었다. 또 한명의 인상깊은 선수는 쁘아까오였다. 상대방의 현란한 풋워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상태에서 나오는 그의 펀치와 킥은 위의 두 선수에 못지 않았다.
사실 이종 격투기 경기를 보면 이제는 아마추어 경기로 확실히 노선을 정한 듯한 태권도가 왠지 초라해 보인다. 이종 격투기 대회에 참여하면 자격을 박탈한다는 규정까지 있다하니, 타 격투기와의 대결은 이제 입씨름으로만 이루어질테지. 태권도 협회의 비리같은거야 뭐 말할 것도 없을테고…
언제 기회가 되면 정말 관람하고 싶은 경기다. 그런데 워낙 티켓이 비싸다. 링코너가 15만원이란다. 읔!
September 11th, 2003 at 2003-09-11 | pm 03:19
저희도 오늘 제사요…
어머니는 별 불평 안하시는데, 일이 많긴 하네….
제발 같이 겪어 보자…. (그렇지? 실망하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