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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th, 2003

Doesn’t it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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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Different

September 20th, 2003

applewatch

다르게 생각하기
다르게 생각하기
다르게 생각하기
다르게 생각하기
다르게 생각하기….

One Response to “Think Different”

  1. First Weblog Says:

    트랙백
    트랙백 시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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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02:00

September 18th, 2003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
.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
.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이렇게 잘게 나누어 놓으면 모든게 나의 마음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새벽 두시,
시를 읽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2 Responses to “AM 02:00”

  1. 엽쥐 Says:

    시 …좋다…

  2. 머무르기 Says:

    주말에는 날씨 좋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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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바 카즈시. 많은 프라이드 선수들이 있었고 실력이 월등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 선수들 틈에서 묘한 매력을 가지고 인기를 끌었던 선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름대로 익살적인 공격과 센스있는 포즈, 유머감각등을 두루 갗춘, 한 마디로 실력과 쇼맨쉽을 겸비한 선수였다. 그레이시가를 차례로 격파하면서 그레이시 킬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런 사쿠라바가 정말이지 재기이 염려될 정도로 개맞듯이 맞은 경기가 있었는데 바로 반드레이 실바와의 경기였다. 보고 있는 내가 다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심하게 맞은 경기였다. 실바는 마치 묶어놓은 개를 잡듯이 사쿠라바를 가격했는데 이후 사쿠라바는 부진의 늪으로 빠져든다. 실버와의 두번째 경기도 역시 참혹했다.

그런 사쿠라바가 재기를 위해 다시 3번째 도전을 한 경기가 이번 경기다. 사쿠라바가 원해서 1라운드에 맞붙었다고 하는데, 결과는 역시 참혹했다. 반드레이 실바의 롱훅이 사쿠라바의 턱에 적중하면서 정신을 잃고 라운드에 쓰러졌다. 후일담이지만 사쿠라바는 당시 경기를 계속 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만큼 펀치의 위력이 대단했다. “턱에는 장사 없다. 인간이라면 턱을 맞으면 누구나 정신을 잃는다” 는 해설자의 말이 참 공감이 가는 순간이다.

언제 이고르 보브찬친복귀전이나 보고 싶은데…. 그도 KO패를 당했다니 역시 Pride의 무대는 넓고 격투사들은 무섭다. 타이슨도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다니 세기의 대결이 멀지 않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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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다

September 17th, 2003

어머니의 표현으로는 “눈이 쏙 들어갔” 다. 몸이 피곤한 것이야 어디 마음이 피곤한 것에 비할까마는, 생각치도 못했던 문제들이 발목을 잡으니 몸이고 마음이고 어디 편히 내버려둘 수 가 없다.

오늘도 주머니를 뒤져 소주를 두병 공수했다. 결국 일이 풀리지 않을때는 이것만한 도피처가 없다. 내일 아침에는 또 얼마나 추레한 모습일까 생각도 들지만, 오늘을 넘기지 못하겠는데 어떻게 내일 생각을 할까?

추석 차례를 지낸지 며칠 지나지 않아 또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다. 음력으로 지내니 항상 날짜 터울이 이렇다. 맛있는 제사 음식을 또 먹을 수 있으니 좋기는 하다만, 제사 준비가 어디 쉬운 일인가? 나도 돕는다고는 하지만 고스란히 어머니의 손이 거쳐야 하는 일이니 죄송스럽기만 하다.

한숨 쉬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동그랑땡에 술 한잔 마시고 푹 자면 내일은 또 좋아지겠지.

참. 그 많은 설겆이를 언제 또 다 한다냐???

2 Responses to “피곤하다”

  1. 머무르기 Says:

    힘내세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고 하늘에 별이 없을까요?
    술은 조금만 먹고…

  2. 바붕이 Says:

    허허… 여기서 형석씨에대한 새로운 면을 보는구료…
    그냥 힘내라는 말만 드리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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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s와의 한판 전쟁

September 14th, 2003

css는 참 많고 독특한 기능과 비주얼을 제공하는 대신에 그 복잡함과 오묘함이 상상을 초월한다. 트랙백을 받은 경우 프레임이 표현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쩔수 없이 원프레임으로 블로그를 개편하면서 이놈의 css와 한판 전쟁을 벌였다.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블럭이 나뉘기도 하고, 100픽셀 정도의 들여쓰기가 나타나고… 미칠 노릇이다. 내일쯤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점검해 봐야겠다.

그나저나 북악에도 블로그를 도입하고 싶긴 한데 역시 무관심속에 사장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선다. 필요로 하지도 않는 컨텐츠를 의미없이 계속 제공하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야심차게 준비한 위키는 이제 나 외에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문구를 떠올리면 결국 그것은 어느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교지라는 콘텐츠를 관리하기에는 위키만한 것이 없다는 개인적인 고집이 결국 무의미한 웹상의 쓰레기를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 불쑥 머리를 내민다…

밤나무골에 다녀왔다. 이제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나무마나 그 꼴이 앙상하고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바람에 한 주먹정도의 밤만을 주워왔을 뿐이다. 할머니 제사에 부족하지 않다하니 그정도로 만족해야지. 올때는 현철이놈 때문에 길을 잘못들어 절벽으로 내려올 뻔 했다. 어릴때 그토록 많이 다녔던 길이 어느덧 희미해져 버린 그런 나이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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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인물현대사인가 하는 프로에 이오덕 선생의 이야기가 나왔다. 근래에 들어 참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코너인데 오늘도 역시 그러했다. 참 가슴 뭉클한 이야기였다.

다음은 한겨레 신문의 기자가 작성한 글이다.

제가 기자가 돼 10여년을 살아보니 아는 사람도 적지는 않아 지인의 부음도 자주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문화평론하던 이성욱 선생의 부음을 듣고 황당한 적이 있었는데요. 최근에 잇따라 세상을 뜨신 이오덕 선생님, 김승훈 신부님에 대해 제가 기억하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그저 두 분 선생님을 한번쯤 직접 만난 적이 있는 한 후생의 기록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선생은 꼿꼿하고 꼬장꼬장할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를 갖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먼저 이오덕 선생님은 국어에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진 분이라면 그 영향을 받지 않은 분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도 대학 시절이나 신문사를 다니면서 이 선생님이 쓴 <우리글 바로쓰기> 시리즈를 가까이하고 제 말하기나 글쓰기에 많이 참고했습니다. 제가 언어관을 확립하는 데 강한 영향을 준 선생님 가운데 한 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것은 받아 내 것으로 삼았고, 어떤 것은 그러지 않기도 했지요.
언제부터인가 우리말을 사랑하는 분들이 많아졌지만, 선생의 우리말 사랑 또한 유별난 것이었습니다. 선생의 우리말에 대한 업적은 따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구요. 개인적으로는 선생의 언어관 가운데 “생활에서 나오는 살아있는 말을 쓰자”는 것이 남다른 탁견이라고 생각하는데요(감히!). 그런 태도는 제가 글을 쓰는 데 한 등불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가 기자로서 기사 쓸 때 그렇습니다.
저는 생전의 이 선생님을 인터뷰를 위해 딱 한 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들어와 수습을 마치고 문화부에서 만 1년이 돼가던 시절이었는데요. 당시 문화부 지면에 우리말 기획 기사(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군요)가 연재 중이었습니다. 지금 검찰 나가는 강희철 선배가 기획한 시리즈였는데요. 거기에 들어가는 작은 인터뷰 기사를 위해 이 선생님을 만났던 것이지요.
그 인터뷰는 제가 기자생활하면서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죄송스런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선생이 돌아가셔서 영영 사과할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96년 1월 제가 선생께 우리말 시리즈 기사 관련해서 작은 인터뷰를 했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승낙하시는 데 두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선생 댁이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의 어느 도시로 서울에서 꽤 거리가 됐다는 점입니다.

인터뷰 기사 자체가 비중있게 마련된 것이 아니어서 저는 경기도 선생댁까지 찾아뵙기가 조금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조금 고민을 하다가 선생께 “언제 서울에 나오실 일이 없으시냐”고 여쭸는데, 선생은 흔쾌히 “따로 갈 일은 없고, 바쁘면 내가 서울로 가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짐을 덜었다는 심정으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하던 날 약속대로 선생님이 한겨레신문을 찾아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노인이었으나, 생각했던 것만큼 선량하고 우리말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분이었습니다.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는 젊은 제가 따를 수 없는 것이었고, 그 나이의 이름을 얻은 사람이 갖게 되는 자신감, 또는 그것은 넘은 자만같은 것은 전혀 없는 분이었습니다. 너무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송구한 마음에 선생을 배웅하러 회사 앞까지 나가서 제가 바보처럼 “뭘 타고 가십니까” 하고 여쭸는데요. 선생님은, 제 기억이 맞다면 “버스 타고 가서 갈아타고 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 “나는 차가 없어요”라고 덧붙이신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제게 한없이 죄송스럽고 또 죄송스런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그렇구나. 저 마르고 구부정한 노인이 적어도 한 시간 정도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이 곳 공덕동 산비탈의 신문사까지 힘들게 찾아왔구나. 고희를 넘긴 저 노인이 27살(당시 제 나이) 먹은 이 새파란 기자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셨구나. 그리고 이제 한 시간이 넘는 길을 또 돌아가tu야 하는구나.”
“살펴가시라”는 인사에 손사래를 뒤로 치시며 이 선생은 휘적휘적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셨습니다. 젊은 제게 큰 교훈을 남겨두시고는 그렇게 떠나가셨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당시 신연숙 문화부장이 그러시더군요. “노인을 여기까지 오시게 했느냐. 선생 뵙기가 민망하더라”하고 말입니다. 저는 말 그대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물론 제가 그 일로 인터뷰나 현장 취재 때의 게으름을 완전히 떨어내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제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 일을 할 때도 자신을 낮추거나 버리는 것을 배우지 못했고,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를 갖추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선생을 만나기 전보다는 제 됨됨이가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고 위안해 봅니다. 나아지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선생께 누가 되는 일이 될 테니까요.
세상에는 단 한 번의 만남에서도 남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말로는 되지 않고, 또 행동을 꾸민다 해도 되지 않는 것이기에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자취로써, 인격의 향기로서 자연스레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여준다”는 표현도 적절치 않습니다. 그냥 드러나고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글에서 보니 이 선생님의 장례식도 선생의 뜻에 따라 당신의 삶처럼 조촐하고 뜻있게 치러졌다고 합니다. 저는 그 곳을 찾아가는 예마저 갖추지 못했으니 정말 못되고 불초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나마 마음을 삼가고 옷을 여며 선생님의 영혼에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은 당시 선생과 인터뷰한 뒤 96년 1월21일치 신문에 쓴 기사입니다.


“우리말을 망치는 것은 배운 사람들입니다. 유치원 교사부터 대학 교수까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이들이 어려운 말을 골라 씁니다. 어떤 유치원에서는 소꿉놀이를 역할놀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이러니 아이들까지 괜히 어려운 말을 따라 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우리말·글 바르게 쓰기 운동을 벌여온 이오덕(71)씨는 쉬운 말을 쓰는 것이 우리말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농민과 노동자처럼 땀흘려 일하는 ‘백성’들의 말이 가장 쉽고 건강하다고 본다. 배운 이들은 괜히 젠체하느라 입으로 하지 않는 말을 머리에서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하므로 주의깊게 말을 써야 하는데도 영어나 일본어, 한자말을 마구 씁니다. 문제는 이들이 생활언어에 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산 말을 버리고 죽은 말을 따라가는 것이죠. 신문은 여러 부문의 온갖 용어들을 한 지면에 적으므로 쉽게 써야 하고, 방송말은 발음을 가르치므로 정확해야 합니다.”
이씨가 보기에, 현대 시멘트 도시의 살벌한 생존 경쟁은 말을 거칠게 만들었다. 환경이 말을 바꾼 것이다. 이를테면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우리말에 된소리·거센소리가 많아진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말은 거꾸로 쓰는 사람의 마음을 거칠게 만든다. 어찌 보면 현대의 우리말이 험해지는 것은 하릴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말은 삶에서 나올 때 살아 있습니다. 배운 사람의 말은 생기가 없고 어렵습니다. 지식인과 언론이 삶에서 나온 말과 글을 써 이들이 뿌리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김규원 기자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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