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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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러운 소품들과 아름다운 경관을 잔잔하게 비추어주는 화면은 참 이쁘다. 뭐 그뿐이다. 난 미쉘 파이퍼가 나오는 위험한 관계가 훨씬 마음에 든다. 별 이유는 없다. 오로지 미쉘 파이퍼가 나오므로…

아~ 그나저나 너무 피곤하다. 저녁 먹은게 체한 듯 해서 오랫만에 손가락 땃다. 까만 피가 나오더군. 어렷을 적 하던대로 발바닥에 문질렀다.

추워라~

설날 아침 너무 춥다. 까마귀도 추워서 얼어죽을 듯한 추운 날씨. 이것저것 할일은 많아 부산하지만, 움츠러든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마음만 너무 멀리 가고 있는 새해 첫날 아침!

새해 福 많이 쟁취하시라~

새해에는 웃는 모습 더 많이 보여주기를…

에피소드

겨울에는 역시 눈이 내려야 제 맛이다. 오늘 내리는 눈은 반짝이는 눈이라서 가지고 놀기에는 알맞지 않지만 보기에는 좋다. 반짝거리는 것이 꼭 유리를 온 길에 뿌려놓 듯 이쁘다. 하지만 보기에는 좋더라도 길이 미끄러워지니 여기저기 위험한 사고의 순간이 목격되는데, 오늘 내가 탄 버스가 그랬다. 사람을 태우고 막 출발하려는 찰나에 앞에 있던 트럭(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렌지 한 상자에 5000원 하는 그런 트럭)이 갑자기 유턴을 시도하는 것이다. 컥~ 버스 기사분이 정말이지 놀라운 순발력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꺽는 바람에 다행이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버스는 중안선을 넘어 반대 차선에 거의 차체의 2/3가 넘어가 버렸다. 반대차선에 차가 달리지 않았길래 망정이지 정말이지 큰 사고 날 뻔했다. 일단 차를 다시 본래 차선으로 돌려놓고 앞문을 연 기사분, 입으로는 온통 거친 소리 뿐이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느가. 흘깃 보니 아마 트럭 운전수가 나와서 이쪽으로 오나 보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곧 벌어질 싸움을 잔뜩 기대했다. 드디어 앞문에 온 트럭 운전수 등장. 두둥~ 개봉 박두. 그런데…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차가 눈 때문에 브레이크가 안 먹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연신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초로의 아저씨. 버스 기사의 그 전투의지는 이미 거기서 한 풀 꺽여버렸는지, 에이씨~를 연발하다가는 결국 “네,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럽네요. 조심하셔야죠..” 뭐 결국 이렇게 시시하게 일단락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그리고 문을 닫을때는 “설 연휴 잘 쉬세요” 서로 덕담가지 나누는 화기애애모드. 오늘의 에피소드.

착하다는 말을 들었다. 설마?
생각해보면 요 몇년간 싸움 비슷한 걸 해 본 기억이 없다. 아니 기억이 온전한 부분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그렇게 심하게 싸우거나 화를 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맹물같이 살고 있는 거지? 나는…

타자연습하기

1.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에르바하의 것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Wirklichkeit), 감성(Sinnlichkeit)이 단지 ‘객체 또는 관조(Anschauung)’의 형식 하에서만 파악되고, ‘감성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립되는 관념론―이것은 물론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그 자체는 알지 못한다―에 의해 추상적으로 전개되었다. 포이에르바하는―사유객체와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감성적 객체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Wesen des Christenthums)본질』에서 오직 이론적인 태도만을 참된 인간적 태도로 보고, 반면에 실천은 단지 저 불결한 유대적 현상형태 속에서만 파악 하고 고정시켰다. 따라서 그는 ‘혁명적인’, ‘실천적·비판적인’ 활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2.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는 결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즉 그의 사유의 현실성과 위력 및 현세성(Diesseitigkeit)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유의 현실성 혹은 비현실성에 대한―이 사유가 실천적으로 유리 되어 있다면―논쟁은 순전히 ‘공리공론적인(scholastische)’ 문제에 불과하다.

3. 환경과 교육의 변화에 대한 유물론적인 학설은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화되고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따라서 이 학설은 사회를 두 부문―그 중 한부분은 다른 한 부분보다 더 우월하게 된다 ―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혹은 자기변혁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4.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자기소외(selbstentfremdung)라는 사실, 즉 세계가 종교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로 이중화(verdopplung)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종교적 세계를 그 세속적 기초 안에서 해소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세속적 기초가 그 자신으로부터 이탈하여 구름 속에서 하나의 자립적 영역으로 고착된다는 사실은 이 세속적 기초의 자기분열 및 자기모순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속적 기초 그 자체는 우선 그 모순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다음에는 이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실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컨대 지상가족이 신성가족(heilige Familie)의 비밀임이 폭로된 이상은 이제 지상가족 자체가 이론적 및 실천적으로 전복되어야 한다.

5. 포이에르바하는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고 ‘직관(Anschauung)’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

6.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 안에서 해소시킨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ensemble)이다. 이렇듯 현실적 본질에 대한 비판으로 들어서지 못한 포이에르바하는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 1. 역사의 진행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심성(Gemuet)을 그 자체로서(fur sich) 고정시키며, 따라서 하나의 추상적인―’고립된’―인간 개체를 전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2. 따라서 그 본질은 단지 ‘유(Gattung)’로서만, 다수의 개인들을 ‘자연적으로’ 결합시켜주는, 내적이고 침묵을 지키는 보편성으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7.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심성’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 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분석한 추상적 개인이 사실은 일정한 사회형태에 속해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8.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는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Mystizism〔us〕)로 유도하는 모든 신비는 인간적 실천 속에서,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개념적 파악 속에서 그 합리적 해결책을 찾아낸다.

9. 직관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서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개별적 인간의 직관, 즉 시민사회의 직관이다.

10. 구태의연한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또는 사회적 인류(die gesellschaftliche Menschheit)이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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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 대학 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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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ㅌ 과 ㅊ 의 위치를 헷갈린다든지 ㅇ 과 ㄴ 의 위치가 헷갈리면 장문치기 연습을 한다. 이제 한메 타자교실은 이용하지 않으므로 항상 마음에 드는 글귀를 타이핑한다. 적을 때마다 기쁜 글귀를…

보기만 해도…

보기만 해도 황홀하다. 눈이 부실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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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S

GB Set-In neck
3pc. Maple Neck Material
Spruce top, Maple back/sides Body
21/Medium frets
Bound Ebony Finger Board
Ebony bridge
IBZ GB Special (H) Neck PU
IBZ GB Special (H) Bridge PU
Pearl/ Abalone Block Inlay
GD : Hardware Color

신기한 건 분명 Ibanez George Benson 모델 같은데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Ibanez홈에서도. 다른 건 다 같은데 네크에 새겨진 문양이 틀리다. 이게 더 럭셔리하다. 스펙은 GB10BS에서 따옴.

ps. 집에 있는 레스폴 픽업을 갈아줘야 할 낀데… 벌써 몇년째 쳐박혀 있는 거냐?

Think Global, Act Local

세계평화라… 한때 거대담론에 심취(?)해서 살았을때, 세계혁명론을 학습할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는 명제를 가슴속에 품고 살았을때, 그때 나는 진정으로 세계 평화를 걱정하며 살았다. 양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욕하는 친구에게 ‘너의 그 민족적 편협함’을 버리라고 주제 넘게 떠벌렸으며, 값싼 중국 농산물의 범람을 우려하는 친구에게 거만하게도 ‘중국 농민의 비애’를 설파하고자 애썼다. 아~ 나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한 마리 짐승이었나? 이미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무너진 폐허에 서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어리석은 열성을 붙잡고 있었던 것일까? 이제는 장난처럼 이야기하는 ‘세계평화’지만, 나도 한때는 정말 진지했었다고… 제길….

핵심에서 사고하지 못한 나같은 언저리 인생에게는 물론 모든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찾아헤맨 세계평화를 다르게 생각하게 된건 환경문제를 고민하게 되면서. 아직도 김종철씨 류의 환경담론에는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대한 담론의 손아귀에서는 어느정도 벗어난 느낌이다. (거짓말.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리 사소한 일이더라도 나는 예전처럼 실망하거나 가볍게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의 제 1원칙이 아니었던가! 결국 나는 세계평화의 한 모퉁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심한 자기 만족인가….???? ㅋ~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책이지만 좋은 책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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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표지도 바뀌고 주변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좋겠지… 흠흠…

바쁘다 바뻐~~

한 일주일을 무언가에 쫒기듯 엄청시리 바쁘게 보냈다. 이일을 맡으면 저일이 생기고 저일을 하고 있으면 또 새로운 일이 발목을 잡고…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오죽했으면 자리에 눕기만 하면 골아 떨어지고, 그러면서 아~ 다시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하지만 오늘 오전에 싱가폴로 우편물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어깨를 짓누르던 모든 압박은 날아가 버렸다. 숙자에게 줄것은 숙자에게, 덕자에게 줄것은 덕자에게, 성자에게 줄 것은 성자에게 주고 나니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 버린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제 좀 여유를 가지고 클라이언트 한 명 만나서 새 일만 맡으면 끝이다.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