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볼 것.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 게오르크 루카치

‘소설의 이론’ 첫머리에 나오는 이 귀절은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웬만큼은 알고 있을법한 유명한 귀절이다. 소설과 전혀 상관 없는것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 책 전체의 주제를 가장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명문이다.
아마 1993년의 어느 술자리로 기억되는데, 정덕이형으로부터 이 책을 받았다. 이미 술이 얼큰하게 취했던 형은 가방에서 몇권을 책을 꺼내 한권 고르라고 했고,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책을 골랐었다. 다른 책들은 기억이 안나는데 엘리어트의 ‘황무지’는 기억이 난다. 신기하게도. 이 책은 종호형이 가져간것 같다.
당시만 해도 이미 한 물 건너간 분위기였지만 어쨋든 루카치는 문학이론가로서가 아니라 사회주의 이론가로 더욱 각광받았었고, – 물론 루카치는 매우 독실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 실천적 필요성이라고 해야할까, 그 비슷한 이유로 많이 읽혀지고 있었다. 역사와 계급의식 같은 책도 꼭 읽어야할 책중 하나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그 실천적 필요성이 절박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책을 완독한것은 한 참 후의 일이다. 누구나 한두 권쯤 그런 책이 있을 텐데 이 책도 한참동안을 앞부분만 새까만 책으로 남아있었다. 군대에서 벗어나 잠시 유유자적하던 시기에 비로소 그 마지막 장을 넘겼다. 하지만 군대에서 이미 굳어버린 머리로 완벽한 이해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한참 나중에 다시 또 읽었다.

11월의 마지막 날, 후배 결혼식에 참석도 못하고 밤하늘을 보며 걸어오다가 문득 루카치 생각이 났다. 우울한 날에…

참고링크 :
http://www.othervoices.org/blevee/lukacs.html
http://www.kungree.com

세상 헛살았군…

멀리 가래비에 장이 선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으셨는지 갑작스런 어머님의 성화에 동생이랑 팔자에도 없는 장구경을 가게 되었다. 구경이라기 보다는 사실 어머님이 꼭 사야 할게 있어서 우리 둘은 들러리 겸 머리도 식힐겸 따라나선 것이지만… 또 그 먼길을 당신 혼자 버스타고 다녀오시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충 옷을 차려입고 차를 몰고 나오면서 기름을 넣으려는데 바로 집앞 주유소에 내부수리중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출입구가 막혀있는 것이다. 집에서 가깝고, 무엇보다 시내로 나가는 방향이기 때문에 거의 이 주유소를 이용하는데 엊그제만 해도 별 이야기 없더니만 수리중이라니, 아니 수리중이라도 그렇지 뭐하러 출입구 까지 막고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동생하고 조잘대는데 어머님의 한 마디. ‘수리중은 무슨, 단속 맞아서 영업정지 먹은거지. 양을 적게 줬거나, 다른거 타서 정지먹은 거야. 앞으로 여기는 다니지 말아야 겠다’
일순간 동생하고 멍~ 하니 있다가, 맞어 그럴거야. 내부수리하는데 출입구를 막을 이유가 없지, 먼 잘못을 했길래 정지를 먹었을까? 왜 그런 생각은 꿈도 못꿨을까? 나의 통찰력은 결국 현상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는 것인가? 세상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 세상을 착하고 순진하게 살아온 것도 아닌데…

그 먼 길을 달려 장에서 사온것은 콩, 팥, 수수등 잡곡. 굳이 그 멀리까지 가지 않았도 살수있지만 시장에서 사는건 싸긴 한데 모두 중국산이라 맛이 없으시단다. 여기는 정말 집에서 기른거 내다 파는거라 좀 비싸긴 해도 훨씬 맛있다고, 물에 담궈놓으면 색깔부터 틀리고, 밥을 해놓으면 윤기가 난다는 어머님 말씀. 덕분에 계속 맛있는 밥 먹을 수 있겠군. 좋다. 어쨋든 지금까지 세상 헛살았으니 참으로 난감하군.

새벽 4시 10분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요즘이다. 이유는 가지각색, 술을 먹는 모습도 각양각색, 그렇지만 모두 나름대로 힘든 것이 있을 것이다. 요즘같은 세상에 누군들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

술을 먹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던 어린 시절에는 결국 모든 일상의 종착지는 술일수 밖에 없었다. 명확한 결론도 필요치 않고, 단지 일시적인 위로와 자기만족이 가능하고, 게다가 습관성 기억상실증은 얼마나 편리한 도피의 수단이었던가?

혼자 먹을 수 있는 술은 소주 두병이 딱 한계다. 입을 꾹 다물고 혼자서 술만 홀짝거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아는 사람은 안다. 아는 사람만 안다. 말못하는 고양이 인형을 옆에 두고 이것저것 지껄이면서 술을 먹고 싶지만, 그것 참, 무슨 짓이랴? 나에게나, 고양이에게나 못할 짓이다.

꼭 술을 많이 먹어야 제맛은 아니라고 위로하면서, 쓸쓸하게 TV를 보면서 계속 먹는다. 외로워할 지언정, 부러워하지 않는다 -솔로부대 행동강령 16호. 하긴 지금 시간을 생각해보면… 제길슨. 36.5도의 생체난로는 필요치 않다. 우리는 무적의 솔로부대다.

그렇다. 벌써 나는 많은 술은 먹은 것이다. 짐작했겠지만….

야마카시와 클림트

image
야마카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그림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에게는 어딘지 익숙할 지도 모르겠다. 영화 후반부에 야마카시들이 훔치는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다. 맞나? -_-)//
형사가 묘한 시선으로 주인여자와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바로 그 그림. 구스타프 클림트의 ‘금붕어(GoldFish)’다. 참으로 먹음직(?) 스럽지 않은가? 여자의 저 묘한 눈초리를 보라. 사실,… 내 스타일은 아니다. ㅡ,.ㅡ 이런 관능적인 그림을 보고 욕정을 억누르것이 가능한지 반문하고 싶었던 것일까? 동시대의 주류에서 비껴나와 파격적인 소재와 자유로운 화풍으로 엄청난 관능을 창조해낸 클림트는 그러나 바로 그때문에 나찌에 의해 작품이 불살라지기도 하는 불운을 겪었다.
암튼 야마카시에서 클림트의 그림을 보고 불현듯 머리속에서 떠오른 건 영화도 그림도 아니라 군대시절에 읽었던 한권의 책이다. 더불어 당시의 고단한 일상도… 엄청 꼬인 군번덕에 상병이 되고도 쉽사리 책을 읽을 수 없었던 그때, 제목은 기억이 안나지만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삽화로 들어가고 주인공이 클림트를 아주 좋아하는 소설책을 읽었다. 이제는 내용도 가물가물하고 줄거리도 잘 모르지만 클림트에 대한 인상이 강했던지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아마 일기장 뒤져보면 나올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소설에서 기억나는 부분이 하나 있다면 주인공의 친구가 마약을 들여오기 위해 마약을 집어넣은 콘돔을 30개인가 먹고 공항을 통과하다 배속에서 콘돔이 터지는 바람에 죽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는 것이다. 곳곳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혹은 작가가 직접 클림트의 그림과 인생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참 관능적이었다고 할까? 물론 줄거리도 아주 관능적이었다. – 남자만 있는, 여자라고는 몇달에 한번씩 구경하는 곳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 관능이 얼마나 뇌리에 쏙쏙 박혔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 고단했던 군대시절을 생각나게 했으므로 야마카시는 무효! 게다가 풍자는 너무 노골적이라 와닿지 않고, 줄거리도 너무 직선적이다. 오직 위안을 삼을 볼거리는 그 무시무시한 점핑과 스파이더맨을 능가하는 빌딩타기. 카메라를 잘 잡아서인지 빌딩을 오르는 모습은 아주 생동감있고 멋있다.

집에 가는 길

수유리에서 버스를 타면 보통 집까지 한 50분 걸리는데 요즘은 1시간에다 20분은 더 걸린다. 곳곳에서 길을 막고 벌이고 있는 공사 때문이다. 녹슨 수도관을 교체하고, 가스관을 수리한다는데 사실 그 말대로라면야 약간의 불편이 있어도 감수할 수 있겠지만 그 속속을 알고 있으니 열만 뻗치다. 이런 모습 보기 싫으면 지하철을 이용할 수도 있는데, 왠지 아침에는 지하철을 타기가 싫다. 버스를 타고 비스듬히 비치는 햇빛을 안고 가는 것도 나름대로 맛이 있다.

공사하는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올해도 다 갔구나’ 하고 느끼는 건 참 우울한 일이다. 연말에 공사를 해야 하는 공무원들의 일처리가 우울하고, 덧없이 올 한해를 보내는 내 신세가 우울하고, 서른을 훌쩍 넘어버릴 나이 때문에도 우울하다. 적어도 내년 7월까지는 29이라고 우길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이레저레 우울한 날에 보사노바나 들어볼까?

image

문장강화

“>

참고로, 책값은 4000원. 우체국 택배를 이용하면 우송료 1000원. 총 5000원에 이 보물을 품에 안을 수 있다. 제목의 강화는 강화强化 – [명사] [하다형 타동사][되다형 자동사] 모자라는 점을 보완하여 이제까지보다 더 튼튼하게 함,또는 튼튼하여짐. – 가 아니라 강ː화(講話) – [명사] [하다형 타동사] (어떤 주제의 내용에 대하여) 강의하듯이 쉽게 풀어서 이야기함,또는 그 이야기. – 라는 점에 유의할 것.

불과 십수년 전만 하더라도 월북작가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지만 말할 수 는 없는 사회적 금기에 속했었다지만, 적어도 무지에서 비롯한 나의 책읽기는 그런 금기의 벽을 얼씬거려 본 적도 없다. 그만큼 거부감이라던가 경외감을 느낄 기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하긴 ‘피바다’나 ‘한 자위단원의 운명’ 같은 책들을 나는 별 어려움이나 두려움도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어쨋든 이용악이나 임화같은 사회주의 성향의 문인들을 좋아하는 까닭에, 이태준은 ‘해방전후’외에는 이렇다할 판단의 근거는 없었지만 단순히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더 신뢰가 갔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또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책의 내용도 아주 좋다. (한가지 열받는 사실은 남한에 남아있던 문일들이 가졌던 친일성이나 반 민족적 성향에 비해 비록 이념에 경도되었다고는 하나 민족의 자존과 하층민의 고통을 알았던 월북작가들이 아직까지 그 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말 1939년도에 쓴 책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날 정도로 세세하고도 담백하게 글을 쓰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논술 학원 혹은 글쓰기 과외가 횡횡하는 이때에 역설적이게도 훌륭한 글쓰기 책이 없다는 사실은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게 한다. 부디 책을 사거들랑 한번 읽고 책장에 꽂아놓은채 감상에만 젖지 말고 항상 읽을 수 있는 곳에 놓아두고 두고두고 읽어보기를….

BONUS

북쪽 – 이용악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 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르다

오랑캐 꽃 – 이용악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 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졸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cypher –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나는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 라캉

사이퍼를 이야기하기 전에 큐브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영화 광고에 항상 ‘큐브의 감독’이라는 설명이 친절히 따라다니는데, 단순히 동일 감독의 작품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영화의 메타포에 주목하면 영화를 이해하는게 보다 더 수월해지는 점도 있다.

인간은 자신의 주체를 언어를 통해 형성하게 된다. 언어를 통해 형성된 주체는 당연히 언어를 벗어날 수 없게 되고 결국 언어적 구조물에 같히게 된다. 영화 큐브에서 큐브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 언어적 구조물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음모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주체는 이미 언어에 꿰뚫어져 있는 것이다.(S+/)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가 바로 그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주체다.
그런데 시니피앙은 시니피에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큐브에 의해 만들어진 주체는 결코 큐브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사이퍼에서 큐브는 계속 뒤틀리기 시작한다. 큐브를 벗어난 주체에 닿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속 주체를 형성하지만 빨간약은 계속 시니피에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영화를 보면서 메타포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고, 또 놓친다 하더라도 영화가 재미없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이퍼를 통해 굳이 심오한 철학적 궤변을 늘어놓느니 그 반전에 반전, 속임과 속임의 반복 속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큐브의 존재를 인정하건 안하건 어차피 우리는 큐브속에 살고 있으니까.

정리가 안되는 건, 이미 내가 라캉과 데리다로부터 너무 멀리 와서 인가? 오랫만에 생각해 볼 좋은 영화를 봤다. 그러나 타인의 생각이 덕지덕지 들러붙어버린 감상은 왠지 초라함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