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회하기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만한 TIP!!!

Linux :

ssh -D 10000 remote-server

PUTTY(Windows) :

Session 세팅후
Connection -> SSH -> Tunnels
Add new forwarded port:
Source port 10000
Destination localhost
*Dynamic
Add
open

socks를 사용하는 프로그램들에서 localhost:10000로 socks proxy 설정

회사네트웤에서 막아놓은 특정사이트 가령 싸이, 디씨등과 당나귀, MSN메신저 모든것이 가능하다.
단, 원격접속이 가능한 서버는 필수.

마르크스 읽기

마르크스의 온전한 이해를 통해 내 것으로 만든 뒤 창조적으로 활용하기에 이르려면 마르크스의 생애를 충분히 개관하고, 생애 속의 주요한 정치적 사건들 간의 관련성을 탐색해야 하며, 동시에 마르크스가 그러한 현실을 개념화한 이론적 과정과 성과를 잘 알아야 한다. 그에 이어서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당대에서 떼어내어 균형있는 시각으로써 검토하고 오늘날의 한국의 상황에 적용해보려는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것이다. 말은 쉽지만 이는 이론과 실천의 두 영역 — 물론 이는 편의상의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 에 걸친 힘겨운 노고를 필요로 하겠거니와….(후략)

내 수준은 메타포만 응용해보는 수사학적 수준에서 크게 발전한 점이 없다. 떠들고 으시대기 바빠서 전략의 혁신과 풍부화의 차원에서 마르크스를 이해해 본적은 없다. 정치전술의 차원에서 이용해본적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것도 아주 초보적인 사회성을 가진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했다. 슬프지만 이게 현실이고, 아직도 자본론은 그 깨끗한 표지를 자랑하면서 책장에 놓여있다.

요새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본 구절. ‘아직도 노동가치설을 믿고 있는 불가사의한 인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유영원씨의 글.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마지막 수준의 전유, 즉 온전한 이해를 통해 내 것으로 만든 뒤 창조적으로 활용하기에 이르려면 그람시의 생애를 충분히 개관하고, 생애 속의 주요한 정치적 사건들 간의 관련성을 탐색해야 하며, 동시에 그람시가 그러한 현실을 개념화한 이론적 과정과 성과를 잘 알아야 한다. 그에 이어서는 그람시의 사상을 당대에서 떼어내어 균형있는 시각으로써 검토하고 오늘날의 한국의 상황에 적용해보려는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것이다. 말은 쉽지만 이는 이론과 실천의 두 영역 — 물론 이는 편의상의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 에 걸친 힘겨운 노고를 필요로 하겠거니와 이 책은 그러한 노고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생애, 주요 개념, 개념과 현실의 관계 등을 간결하면서도 적확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amarius : ex libris 中
http://armarius.net/ex_libris/archives/000429.html

낚시질

서버가 느려서 로딩에 시간이 좀 걸린다.(라고는 하지만…)

viewimg

가장 흔한 형태의 낚시는 그럴 듯한 제목의 게시물을 올리고 내용은 제목과 전혀 관계없는 생뚱맞은 것을 적는 방법입니다. 글의 제목은 미끼 또는 떡밥이라고 부르는데 떡밥이 그럴 듯해야 많은 햏자들을 낚을 수 있기 때문에 낚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사용했던 떡밥을 사용하지 않고 신선한 떡밥을 쓰는 것은 강태공으로서 갖춰야할 기본자세입니다.
-DCinside

허무시리즈와도 일맥상통하는 이 낚시질. 내 경우는 낚시질 자체보다는 낚인글보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낚시라는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본 사진한장. 이미 아주 오래전에 본 사진이라 로딩되는 시간을 참지 못하고 댓글로 내리려는데… 이자와가 튀어나온다. 이럴때 제대로 파닥파닥거려주는 쎈쓰.

이것도 비슷한 부류의 쎈쓰가 돋보이는 작품. 약간 더 안타깝긴 하지만.
제목은 위, 아래 둘다 므흣한 것이었다. 밑밥은 제대로.

wait

진짜 웃겼던 또 다른 18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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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를 대체할 pixelpost

pixelpost를 설치했다. 기존에 사용했던-_-; gallery에 비해 좀 세련되보이고, 관리가 좀 편해보인다. 대세는 wordpress와 pixelpost!!! 이제 template만 대충 정리하면, 어느정도 사용할 여건은 만들어지는데, 문제는! 올릴 사진 & 이미지가 없다는 것. 나는 생산자 producer가 아니지 않은가.ㅜㅜ 디카 하나 장만하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일반 보급형 디카 하나 구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냐마는 마음은 dslr로 기울어버린지 이미 오래고, 나의 구매력과는 엄청난 간극을 보이고 있다. 일단 바닥을 고르고 건물을 올릴준비부터 철저히…

후~ 진정하고, 이제 대충 지난 gallery 나 wiki, 각종 garbage들을 정리해야겠다. 뻔뻔한 무료사용자가 200Mb에 가까운 용량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것이 아무래도 민망하다. 한번의 기부는 이제 시효가 지나도 한참을 지난것 같고-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어떤식으로든 반대급부를 치루어야 할텐데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저 관리자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낄 수 밖에.

웹폰트

어디선가 깔끔한 폰트가 적용된 홈페이지를 보고는 괜찮타싶어 자세히 뜯어보니 자체 제작한 웹폰트였다. 글씨가 좀 작은 감이 있었지만 탐이 날 정도였다. 물론 도메인이 임베딩된 웹폰트라 나는 사용하고 싶어도 불가능하고 해서, 충동적으로 티티체로 바꾸어 보았다. 티티체는 그나마 여러 웹폰트 중에서 가독성이 나은것 같다. 좀 엉성해보이는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뭐 그것은 개인적인 취향의 차이겠지. 하긴 나 역시도 웹폰트 자체를 그리 즐겨 사용하는 편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충동적인 사용이다. 여기저기 css좀 손보고 나니 정상적으로 페이지를 보여준다. 오페라와 불여시는 이 웹폰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거기에서 오는 차이점 정도는 용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웹개발자가 표준 환경에 맞는 웹사이트를 구축할 수 있으려면 기본적인 마인드의 전환이 필요하다. 먼저 내용(Content : html/xhtml/xml)과 그 표현 방법(Presentation Method : CSS/XSL) 엄격하게 분리하여야 한다. 이것이 명확해야만 웹 사이트의 유지, 관리, 보수가 용이하고, 장치 독립성, 플랫폼 독립성, 접속 방법 독립성, 장애 정도와 무관한 내용에 대한 접근 가능성이 보장된다.

Tim Berners-Lee가 제창한 웹의 기본 정신은 내용에 대한 ‘보편적 접근 가능성'(상호 운용성, 플랫폼/ 장치 독립성 등을 포함해서)이다. 보편적 접근 가능성(Universal Accessibility)은 결코 글자 모양, 페이지 폭, 색깔 등이 언제 어디서나 다 똑같이 보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XML/RDF 등을 이용한 Symantic Web의 구현에도 보편적 접근 가능성은 중요하게 적용 되고 있다.

웹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웹은 상업성과 화려함에 가려져 웹이 처음 만들어 졌던 기본 정신을 외면하고, 세계적인 표준 동향을 바로 찾아가지 못한 채 한국 내부의 웹으로 전략하고 있 다. 이 가이드가 국내 웹 환경의 접근성과 브라우저 호환성을 좀 더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 다.

-Mozilla.or.kr Cross Browsing 가이드중에서(http://www.mozilla.or.kr/docs/web-developer/standard/index.html)

맨발로 걷는 잔디밭

세상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지고 사는 당신께.

걸어봅시다. 잔디밭.

죽음을 참아 대면하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겪었던 삶의 일면은 당신에게 우스워보일지 몰라도 죽고싶은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

아닙니다. 어떤 것은 아주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맨발로 걷는 잔디밭은 절대적인 평화입니다.

뿔달린 늑대의 2005년板

http://aog.2y.net/forums/index.php?showtopic=1550

리플에 열받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보편적인 의식구조를 가진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처참하다.
대략 10살 전후의 아이들에게 저토록 과격하고 폭력적인 그림을 그리도록 부추긴 것은 비단 교사뿐아니라 전 사회적인 분위기도 한몫 했음이 분명하다. 저렇게 자란 아이들에게 올곧은 시선, 타인에 대한 배려, 상대방을 인정하는 마음을 기대할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한 비틀린 시선,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만 자라나지 않을까?

맹목적인 반공교육, 북한 사람들을 모두 뿔달린 늑대로 만들어 버린 그 교육은 이름을 바꾸고 세련되게 변했는지는 몰라도 아직도 이땅에 살고 있다. 따뜻하지도 합리적이지도 못한 이 무서운 교육의 현장.

넌 한국사람아니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누구처럼 ‘나는 세계인이오’ 하고 말할 수 있는 철학적 사유는 뒷받침 되어있지 못하지만, 그래도 보편타당한 눈으로 세계를 보고자 하는 마음은 있다. 국가의 이익앞에 보편타당한 인류애가 무슨 소용이냐고? 그렇다면 그것은 국가가 잘못된 것이다.